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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주인공

김향란씨 - 절망 대신 희망을 품고 사는 세 모녀

"삶을 포기하지 않게 해주세요"

세 번째 골수이식 수술 앞둔 29살의 외침

절망 대신 희망을 품고 사는 세 모녀

 

 

세 식구가 함께 지내기엔 너무도 비좁은 지하 작은 단칸방에는 아픈 딸을 위해 수없이 닦고 쓸고 소독했을 엄마의 정성이 담긴 훈훈한 온기가 그대로 스며있다.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세 모녀 사이로 유독 작고 가녀린 체구에 얼굴을 반 이상 가린 마스크를 한 김향란씨의 모습이 눈에 띈다. 입원을 앞둔 상황에 혈소판 수치가 낮아 계속 입안에서 피가 잘 멈추지 않는다며 걱정하는 속에서도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반짝거리는 눈과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에는 단단하고 옹골찬 그녀의 성격이 엿보인다.

 

3번째 골수이식이라는 결코 바라지 않았던 순간을 맞이하는 모녀는 겉으론 덤덤해보였지만 오랜 싸움에 대한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진설명> 세 번째 이식수술을 앞둔 향란씨의 모습. 두 번의 이식과 투병으로 몸은 많이 약해져 있지만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희망의 빛이 엿보인다.

 

향란씨의 길고긴 투병생활은 2010년 7월에 시작되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다리에 붉은 반점이 생기는 것을 이상히 여겨 피부과를 찾았지만 피부이상이 아니라며 내과로 가길 권유받았고 내과에서는 혈액수치가 정상이 아니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전했다.

 

그리고 큰 병원에서의 검사결과 내려진 병명은 ‘골수이형성증후군’으로 치료방법은 골수이식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칭다오의 한국회사에 취직해 새로운 희망을 품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으니까요”

 

중국 칭다오가 고향인 향란씨는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아버지와 결국 이혼을 택한 엄마 박경옥씨에게 아들이자 든든한 남편이었으며 지체장애 1급인 언니 미란씨의 좋은 친구이자 든든한 보호자였다.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 향란씨는 한국에 들어와 일을 하고 있던 엄마에게 연락을 했지만 한국행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한국행 비자를 받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아요. 향란이 경우에는 병원의 예약증이 있어야 비자를 받을 수 있었죠. 그래서 부랴부랴 급성골수성백혈병 치료에 유명하다는 서울성모병원에 예약하고 예약증을 중국으로 보냈습니다.”

 

연로하신 조부모와 지체장애 1급의 언니까지 모두 중국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못내 가슴이 아팠지만 향란씨는 얼른 치료받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겠노라 다짐하며 2010년 8월 25일 한국에 도착했다.

 

 

두 번의 이식, 두 번의 실패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진행된 골수검사를 통해 골수이형성증후군이 아니라 급성골수성백혈병이라는 새로운 병명을 진단받게 되었다.

 

10월 병원에 입원해 항암치료를 시작, 곧 이식수술이 진행될 것이라 믿었지만 3차례의 항암치료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후, 결국 2011년 4월 엄마의 골수를 이식받게 되었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병마는 그해 10월에 다시 재발되었고, 2012년 2월 제대혈을 사용해 두 번째 이식수술을 받았다.

 

사실 두 번째 이식 당시에는 미국에 향란씨와 조직이 일치하는 공여자가 있었지만 미국의 공여자를 초청해 이식수술을 받기에 모녀의 경제적 부담(미국에서 골수를 채취해 한국으로 이송하는 비용만 5천만원)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공여자의 골수 대신 제대혈을 이용한 이식수술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진행된 2차 이식은 성공적이었고 1차 이식 후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엄마는 1차 이식에 실패한 경험을 기억하며 딸의 건강과 회복에 더욱 신경을 곧추세웠다.

 

“1차 이식 후에도 그랬지만 2차 이식 후에는 더 신경 쓰며 집안 청소는 물론이고 향란이가 쓰는 모든 용품은 매일 물에 끓여 소독하고 물도 4시간에 한 번씩 끓여 먹일 정도로 조심했습니다. 또 제대로 먹지 못하는 향란이가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끼니마다 영양을 따져가며 미음을 만들어 먹였습니다.”

 

엄마의 노력과 정성을 더해가며 향란씨는 하루하루를 견디고 이겨냈지만 불행은 모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사진설명> 3차 이식을 위해 입원하는 날, 향란씨의 성공적인 이식수술 후 밝은 모습으로 다시 세 모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그날을 기다리며...

 

“지난해 추석 즈음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마침 북경에서 놀러온 친구와 병원을 찾아 혈액검사를 받았는데 수치가 악화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1년 7개월 만의 재발이었다. 사실 향란씨는 자신의 재발소식을 엄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1차 이식수술에 필요한 6,000여만 원의 거금은 2001년 한국에 들어와 오로지 두 딸만을 위해 악착같이 일해 모은 돈으로 산 칭다오의 아파트도 모자라 친지들에게 빌린 돈으로 간신히 충당했고, 2차 이식수술은 어떻게든 딸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 동분서주한 엄마의 노력으로 향란씨의 사연을 알려 교회와 사회복지단체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마련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원에서는 이식을 안 할 경우 수혈을 받으며 삶을 유지해가는 방법과 이식하는 방법이 있으나 향란씨가 아직 젊기에 다시 한 번 이식수술을 받을 것을 권유했다.

 

재발 소식에 엄마는 펑펑 눈물을 흘렸지만 향란씨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쉽사리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이식을 포기하면 엄마랑 언니와 함께 할 시간이 짧아지겠지만 또 한 번 엄청난 액수의 병원비와 수술비를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 다시 이식을 한다고 해도 100% 성공한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고민이 많았어요.”

 

향란씨는 자신의 병보다는 혹시 자신이 잘못되었을 경우, 자신으로 인해 엄마와 언니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놓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또, 많은 희망을 가졌던 두 번째 이식의 실패와 두 번째 이식 수술 후 화장실도 못 갈 정도로 힘들고 어려워 몸과 맘 모두 엄청난 고통을 겪었던 그 순간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생각이 향란씨의 결정을 더욱 어렵고 힘들게 했다.

 

하지만 딸을 포기할 수 없는 엄마의 마음과 지인들의 응원, 그리고 많은 이들의 기도와 바람이 3차 이식수술에 용기를 내게 만들었다.

 

가족의 사랑으로 이루어갈 세 번째 희망

 

입원을 위해 백혈병환우회 무균차량 클린카에 올라탄 두 모녀는 가는 내내 맞잡은 손을 놓지 못했고 이식이 성공하면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직도 가족이 밖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며 이식이 성공하면 세 모녀가 가까운 곳에라도 여행을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사진설명> 왼쪽사진: 세 번째 이식준비를 위해 지난 1월 14일 백혈병환우회 무균차량 클린카에 몸을 실은 두 모녀, 두 모녀는 입원할 때 모두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향란 씨는 1월 24일 언니의 골수로 세 번째 이식수술을 받았다. 지체장애를 가지고 있는 언니기에 그 고마움과 언니에 대한 걱정은 배가 되었지만 그러기에 이번 이식수술은 어떻게든 이겨내어 건강한 모습으로 언니와 가족을 위해 앞으로 더 행복해지겠노라 다짐하며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파이팅을 외치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엄마의 하루 일당 5만원으로 겨우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세 모녀에게 3차 이식에 필요한 향란 씨의 수술비와 병원비는 너무도 커다란 짐이자 고민이다.

 

향란씨의 이러한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백혈병환우회는 대한적십자사 헌혈자 2만5천명이 헌혈 후 기념품 대신 받은 헌혈기부권(1장에 4천원)으로 마련한 치료비 기금 1억원 중에서 2천만원을 지원했다. 향란씨는 이 치료비로 세 번째 골수이식을 받았다.

 

향란씨 가족들은 1차와 2차 수술을 겪으면서 그랬듯 3차 수술 역시 많은 이들의 도움과 응원으로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마음에 품게 되었고 이제 향란씨가 건강을 되찾을 내일을 기다리게 되었다.